오늘은 2026년 9월 14일 8시 9분입니다. 이른 아침 전해진 소식 하나가 마음을 무겁게 합니다. 1979년 12월 12일 군사반란과 1980년 518 민주화운동 당시 유혈 진압에 깊이 관여한 정호용 전 국방부 장관이 13일 오전 세상을 떠났습니다. 향년 94세였습니다. 정호용 사망 신군부 핵심 5인의 마지막 생존자가 끝내 공식적인 사과 없이 떠나면서, 그동안 베일에 가려져 있던 진실 규명은 이제 기록과 자료에만 의존하게 됐습니다.
정호용 전 장관은 1932년 대구에서 태어나 육군사관학교 11기로 임관했습니다. 전두환 전 대통령, 노태우 전 대통령과 동기였고, 하나회 인맥의 핵심에 있었습니다. 1979년 12월 12일 군사반란 당시에는 대구에 있던 50사단장이었지만, 반란 이후 신군부는 그를 특전사령관에 앉혔습니다. 특전사 예하에는 광주에 투입된 3, 7, 11공수여단이 있었고, 이 부대가 518 당시 시민과 학생을 상대로 한 진압 작전의 핵심 병력이었습니다.
목차
정호용 전 장관의 생애와 책임을 한눈에 보는 표
| 구분 | 내용 |
|---|---|
| 출생 | 1932년 대구 출생, 육군사관학교 11기 |
| 군사반란 | 1979년 12월 12일 이후 특전사령관에 임명 |
| 518 관련 | 광주에 투입된 3, 7, 11공수여단 예하 부대 지휘 |
| 광주 방문 | 1980년 5월 20일부터 27일까지 네 차례, 약 81시간 체류 |
| 법적 책임 | 내란목적살인죄로 징역 7년 확정 후 특별사면 |
| 사망 | 2026년 9월 13일 오전, 향년 94세 |

이 표만 보더라도 정호용 전 장관이 단순한 주변 인물이 아니었다는 사실이 분명해집니다. 전두환 전 대통령, 노태우 전 대통령과 육사 동기였고, 하나회 인맥의 핵심에 있었습니다. 특히 특전사령관으로서 광주에 투입된 공수부대를 거느렸고, 진압 작전에 필요한 장비를 지원하고 현장 작전회의를 주재한 정황이 법원과 진상조사위원회 조사에서 확인됐습니다. 그런데도 그는 생을 마감하는 순간까지 자신의 책임을 인정하지 않았습니다.
책임을 둘러싼 회피와 끝나지 않은 논란
정호용 전 장관은 재판 과정에서 광주에 투입된 공수부대가 계엄사령부 등 다른 지휘계통에 배속되어 있어 특전사령관인 자신에게는 광주 진압 작전을 지휘할 권한이 없었다고 주장했습니다. 그러나 518 진상조사위원회는 그가 광주를 네 차례 방문해 약 81시간 동안 머물렀고, 현지 작전회의를 주재했으며, 전남도청 재진입작전을 하루 앞두고 광주로 내려와 가발, 수류탄, 항공사진 등 작전 장비를 준비하고 예하 부대원을 격려한 사실을 확인했습니다. 이런 기록은 그의 주장과 정면으로 배치됩니다.
특히 5월 20일 광주에 처음 내려간 날, 장세동 특전사 작전참모가 사회를 보는 가운데 광주에 투입된 3, 7, 11공수여단장들이 참석한 작전회의가 열렸습니다. 조사위는 정호용 전 장관이 광주를 방문할 때마다 이런 회의가 열렸다고 봤습니다. 전투병과교육사령부 상황실 2층에는 특전사가 별도로 사용하는 상황실도 있었습니다. 그는 작전 지휘에서 완전히 벗어나 있었다고 볼 수 없습니다.
더 안타까운 점은 사법적 판단 이후에도 사과가 없었다는 것입니다. 2019년 12월 12일에는 전두환 전 대통령 등 신군부 인사들과 함께 식사하는 모습이 공개되어 반성 없는 기념 오찬이라는 비판을 받았습니다. 2021년에는 자신의 책임을 다시 조사해 달라는 진정서를 내면서 오히려 억울하다는 입장을 밝혔습니다. 지난해 대선 과정에서는 한 정당의 상임고문 명단에 이름이 올랐다가 내란 본색 논란이 일자 하루 만에 취소되는 일도 있었습니다. 정호용 사망 신군부 인물들의 태도는 끝내 변하지 않았습니다.
정호용 사망 신군부 이후 남은 진실 규명 과제
정호용 전 장관의 사망으로 신군부 핵심 5인은 모두 세상을 떠났습니다. 전두환 전 대통령과 노태우 전 대통령은 2021년, 황영시 전 계엄부사령관과 이희성 전 계엄사령관은 2022년에 사망했고, 이제 마지막 생존자였던 정호용 전 장관마저 사라졌습니다. 이제 발포 지휘체계의 최종 판단이 누구에 의해 내려졌는지, 행방불명자들이 어디에 있는지, 민간인 집단 희생의 책임이 어디까지 미치는지 등을 핵심 당사자의 입에서 직접 확인할 길은 없어졌습니다.
기록으로만 풀어야 할 숙제
| 과제 | 설명 |
|---|---|
| 발포 지휘체계 | 광주 시민을 향한 총격 명령이 어떤 경로로 내려졌는지 규명 |
| 행방불명자 | 실종된 시민의 소재와 암매장 의혹을 기록으로 확인 |
| 민간인 희생 | 집단 진압 과정에서 발생한 희생의 책임 범위를 명확히 정리 |
518 진상조사위원회는 2024년에 기존 형사재판 공소사실에 포함되지 않았던 전남도청 진압 희생자 7명을 추가로 확인하고 정호용 전 장관 등을 내란목적살인 혐의로 수사기관에 고발하기로 의결했습니다. 하지만 당사자가 사망하면서 이 고발이 실제 기소로 이어질 가능성은 낮아졌습니다. 그럼에도 기록과 자료를 꾸준히 검토하면 진실에 한 걸음 더 가까워질 수 있습니다.
정호용 사망 신군부 소식을 기억해야 하는 이유
정호용 사망 신군부 기록만이 남은 지금, 우리가 이 소식을 기억해야 하는 이유는 분명합니다. 역사는 가해자의 입장이 아니라 피해자와 유족의 관점에서 채워져야 하기 때문입니다. 한때 권력의 정점에 있던 사람들이 사라진 뒤에도, 희생자들이 겪은 고통은 기록으로 남아 계속 말을 걸어옵니다. 정호용 사망 신군부의 마지막 순간이 반성 없는 죽음으로 남은 것은 너무나 안타까운 일입니다.
이제는 국민의 관심이 중요한 역할을 합니다. 진실 규명은 특정 위원회나 기관의 몫만이 아니라, 우리 모두가 기억하고 요구할 때 힘을 얻습니다. 앞으로도 518 진상조사위원회의 기록 공개, 관련 자료의 재분석, 목격자 증언 발굴이 이어져야 하며, 정치적 이유로 역사가 덮이지 않도록 꾸준히 지켜봐야 합니다. 518 민주화운동은 단순한 과거의 사건이 아니라 오늘날 민주주의를 지키는 데 중요한 기준점입니다.
자주 묻는 질문
Q1 정호용 전 장관은 518 당시 어떤 역할을 했나요?
A1 특전사령관으로서 광주에 투입된 3, 7, 11공수여단의 예하 부대를 거느렸고, 광주를 네 차례 방문해 작전회의를 주재하고 재진입작전 장비를 지원한 사실이 확인됐습니다. 법원은 내란목적살인죄로 징역 7년을 확정했습니다.
Q2 신군부 핵심 5인은 모두 사망한 건가요?
A2 네, 그렇습니다. 전두환, 노태우, 이희성, 황영시 전 지휘관에 이어 정호용 전 장관까지 2026년 9월 13일 사망하면서 신군부 핵심 5인은 모두 세상을 떠났습니다.
Q3 앞으로 518 진실 규명은 어떻게 진행되나요?
A3 핵심 당사자의 증언이 어려워진 만큼 518 진상조사위원회가 확보한 기록과 군 문서, 당시 영상, 목격자 진술을 바탕으로 발포 지휘체계와 행방불명자 문제를 계속해서 규명해야 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