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호용 5.18 유혈 진압 사망 마지막 생존자가 남긴 진실의 무게

오늘은 2026년 09월 14일 오전 6시 30분입니다. 정호용 5.18 유혈 진압 사망 소식이 어제 저녁부터 이어지면서 많은 분이 과거사를 다시 떠올리고 있습니다. 신군부 핵심 5인 가운데 마지막 생존자였던 정호용 전 국방부 장관이 끝내 진실을 온전히 밝히지 못한 채 세상을 떠났습니다.

핵심 정보를 한눈에 정리합니다

정호용 전 장관은 12.12 군사반란과 5.18 광주민주화운동 진압에 관여한 인물입니다. 1997년 대법원에서 내란 중요 임무 종사와 내란 목적 살인 등 혐의로 징역 7년을 확정받았습니다. 아래 표에서 핵심 내용을 빠르게 확인할 수 있습니다.

구분내용
출생1932년, 육군사관학교 11기
주요 역할12.12 군사반란 가담, 5.18 당시 특전사령관
법적 결과1997년 대법원에서 징역 7년 확정
사망2026년 9월 13일, 향년 94세
정호용 5.18 유혈 진압 사망

신군부 핵심 5인과 정호용 전 장관

정호용 전 장관은 전두환, 노태우 전 대통령과 육군사관학교 11기 동기입니다. 1979년 12.12 군사반란에 가담하고, 반란 다음 날 특전사령관에 임명되었습니다. 이희성, 황영시 등과 함께 신군부 핵심 5인으로 꼽히며, 이후 전두환 정권의 중심에서 5.18 진압과 관련한 책임을 지게 됩니다.

12.12 군사반란 다음 날 특전사령관 자리를 맡은 것은 군 내부에서 그의 충성과 역할이 컸다는 뜻입니다. 5.18 당시 그는 광주에 투입된 공수부대에 대해 행정과 군수지원, 작전 자재 준비 등 측면 지원을 했다는 점이 재판에서 유죄 판단의 근거가 되었습니다. 정호용 5.18 유혈 진압 사망으로 그의 진술이 사라지면서, 당시 지휘 계통의 핵심 증언을 들을 수 없게 된 점을 아쉬워하는 목소리가 큽니다.

그는 이후 대장으로 진급하고 육군참모총장을 지냈으며, 전두환 정권에서 내무부 장관과 국방부 장관을 역임했습니다. 1996년 검찰 조사를 받고 1997년 대법원에서 징역 7년을 확정받아 수감 생활을 했습니다. 그런데도 그는 5.18과 자신은 무관하다는 입장을 고수했습니다.

정 전 장관은 전두환 정권이 끝난 뒤에도 정치권에 남았습니다. 1988년 제13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당선됐고, 이듬해 의원직을 사퇴했다가 1992년 제14대 총선에서 다시 당선됐습니다. 군사반란과 5.18 진압에 대한 책임이 끝나지 않은 상황에서도 그는 국회의원과 각종 단체장으로 활동했습니다.

그의 행보를 좀 더 자세히 살펴보고 싶다면 아래 보도를 참고할 수 있습니다.

5.18 진상 규명에 생긴 공백

정 전 장관은 신군부 핵심 5인 중 마지막 생존자였습니다. 5.18 당시 발포 명령과 진압 작전을 누가 어떻게 지휘했는지 가장 잘 알고 있는 위치에 있었습니다. 조사위원회가 2024년 그를 다시 고발했지만 대면 조사는 끝내 이뤄지지 않았고, 그는 서면으로만 기존 입장을 전달했습니다. 결국 정호용 5.18 유혈 진압 사망으로 진실을 확인할 길이 더욱 좁아졌습니다.

조사 과정에서 1980년 5월 20일부터 27일까지 네 차례, 약 81시간 동안 광주에 머문 사실이 드러나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정 전 장관은 광주에 투입된 공수부대가 다른 작전 지휘 계통에 배속되어 있어 자신은 진압 권한이 없었다고 주장했습니다. 법원은 이를 받아들이지 않았지만, 그가 사망할 때까지 직접적인 발포 지휘 여부는 온전히 규명되지 못했습니다.

5.18 진압 당시 작전은 공식적으로 계엄사령관 지휘 아래 이뤄졌지만, 실제로는 전두환을 중심으로 한 신군부가 비공식 지휘선을 쥐고 있었다는 분석이 많습니다. 정 전 장관이 특전사령관으로서 공수부대를 지원했다는 점은 이런 비공식 지휘선의 한 축을 보여줍니다. 그의 사망으로 이 지휘선의 세부 내용을 직접 확인할 기회도 사라졌습니다.

정 전 장관의 빈소는 경기 수원 아주대병원 장례식장에 마련됐지만 부고 공지는 올라오지 않았습니다. 장례식장 누리집에는 해당 호실이 점검 중으로 표시되었고, 언론이 직접 빈소를 확인했다고 전했습니다. 공식적인 공지가 없는 상황은 그가 사회적으로 얼마나 논란이 많은 인물이었는지 보여줍니다.

정치권 논란과 5.18 유공자들의 반응

지난해 제21대 대통령선거에서 국민의힘 김문수 후보가 정 전 장관을 상임고문으로 위촉했다가 논란이 커지자 5시간 만에 취소한 일도 있습니다. 5.18 유혈 진압 핵심 책임자를 정치 캠프에 앉히는 것이 적절하냐는 비판이 나왔고, 결국 위촉은 철회됐습니다. 이 일은 그가 여전히 정치권에서도 논란의 중심에 있었다는 사실을 보여줍니다.

5.18 유공자들은 정 전 장관이 끝내 사과하거나 책임을 인정하지 않고 세상을 떠난 점을 비판했습니다. 광주시민사회에서는 애초부터 진실 규명에 협조하지 않은 태도를 지적하며, 정 전 장관이 갖고 있던 사실이 더 이상 확인될 수 없게 된 점을 크게 아쉬워했습니다.

기록으로 남기는 것이 중요합니다

사람의 목소리로 확인해야 할 진실은 사라졌지만, 기록은 남아 있습니다. 5.18 관련 재판 기록, 조사위원회 자료, 당시 피해자 증언과 작전 문서를 꾸준히 정리한다면 더 많은 사실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역사를 공부하는 입장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한쪽 목소리만 듣지 않는 것입니다. 판결문과 조사 기록, 언론 보도와 유가족 증언을 함께 보면 사건을 보다 입체적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과거사 기록을 살펴볼 때 한 가지 유의할 점도 있습니다. 같은 사건도 누가 쓰느냐에 따라 표현이 달라집니다. 군 기록에서는 작전으로, 시민의 시선에서는 진압으로 읽히는 경우가 많습니다. 따라서 단어 하나에 휩쓸리기보다 원문이 만들어진 시점과 맥락을 함께 확인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정호용 5.18 유혈 진압 사망 이후에도 진상 규명을 위한 노력은 멈추면 안 됩니다. 신군부 핵심 5인이 모두 세상을 떠났지만, 5.18 민주화운동이 겪은 고통은 과거의 일이 아닙니다. 우리가 기억하고 기록하는 이유는 반복되지 않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앞으로도 유가족과 시민사회가 요구하는 진상 규명을 중요한 사회적 과제로 바라봐야 합니다.

마무리하며

정호용 5.18 유혈 진압 사망은 한 시대의 끝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기억해야 할 과거를 다시 마주하는 계기입니다. 신군부 핵심 5인의 생생한 증언은 사라졌지만, 재판 기록과 조사 자료, 피해자들의 기억은 남아 있습니다. 앞으로는 사적인 기억이 공적인 기록으로 남을 수 있도록 관심을 기울이는 일이 필요합니다.

자주 묻는 질문

Q: 정호용 전 장관은 어떤 혐의로 유죄를 받았나요?
A: 내란 중요 임무 종사, 내란 목적 살인, 반란 중요 임무 종사 등으로 기소되어 1997년 대법원에서 징역 7년이 확정됐습니다.

Q: 정 전 장관은 끝까지 책임을 인정하지 않았나요?
A: 네, 공수부대가 다른 지휘 계통에 있었다는 이유로 책임을 부인했습니다. 그러나 법원은 광주 재진입 작전을 지원한 정황 등을 근거로 유죄로 판단했습니다.

Q: 그의 사망으로 5.18 진상 규명은 어려워졌나요?
A: 신군부 핵심 인물 가운데 마지막 생존자가 사라지면서 발포 명령을 직접 확인할 수 있는 증언 경로가 사라졌습니다. 앞으로는 문서와 주변 증언, 기록을 통해 진실을 추적해야 합니다.

댓글 남기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