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22일, 한국 불교계의 큰 어른이신 명진 스님이 제주 서귀포시 하예포구 인근 해상에서 입적하셨습니다. 세수 76세, 법랍 52년의 삶을 마감하신 순간이었는데요. 많은 이들이 갑작스러운 비보에 충격과 애도를 금치 못하고 있습니다. 명진 스님은 단순한 수행자가 아니라, 불교 개혁과 민주화운동, 남북 교류, 사회적 약자 보호에 앞장선 행동하는 수행자였습니다. 이번 글에서는 명진 스님 입적 소식과 함께 그분의 삶과 행적, 장례 절차까지 자세히 정리해 드립니다.
목차
명진 스님 입적, 어떤 상황이었나?
명진 스님은 22일 오전 9시 38분쯤 제주 서귀포시 하예동 하예포구 인근 해상에서 물에 떠 있는 상태로 발견되었습니다. 구조 후 병원으로 이송되었으나 오전 10시 28분, 결국 사망 판정을 받았습니다. 경찰과 해경은 스님이 착용하고 있던 마스크, 스노클, 다이빙수트, 핀 등의 장비를 근거로 프리다이빙 연습 중 사고가 발생한 것으로 보고 있습니다. 스님은 최근 5년간 무릎이 불편해 육상 운동 대신 프리다이빙을 즐겨 해오셨다고 하는데요. 지인들은 가까운 해안에서 발견된 점으로 미뤄, 깊은 바다가 아닌 바다 수영 중 심정지가 온 것으로 추정했습니다.
법구에서는 특별한 외상이 발견되지 않았고 범죄 혐의점도 없어 부검은 실시하지 않기로 결정되었습니다. 스님의 장례는 종교계와 시민사회가 함께하는 종교시민사회장으로 치러지며, 빈소는 23일 오후부터 서울 강남구 봉은사 선불당에 마련되었습니다. 영결식은 25일 오전 10시 봉은사에서 엄수될 예정이고, 다비식은 스님의 출가 본사인 법주사에서 진행됩니다.
명진 스님의 삶, 한눈에 보기
명진 스님은 1950년 충남 당진에서 태어나 1969년 해인사 백련암에서 출가했습니다. 성철 스님 밑에서 행자 생활을 하다가, 군 복무 중이던 1972년에는 베트남전에 참전했습니다. 1974년 법주사에서 탄성 스님을 은사로 사미계를 받은 뒤 송광사, 봉암사 등 여러 선방을 오가며 50차례 넘게 안거에 정진했습니다.
| 구분 | 내용 |
|---|---|
| 출가 | 1969년, 해인사 백련암 |
| 은사 | 탄성 스님 (1974년 사미계) |
| 주요 활동 | 불교계 민주화운동, 조계종 개혁, 남북교류, 봉은사 주지 |
| 입적 | 2026년 8월 22일, 제주 서귀포 해상 |
스님의 삶은 단순한 수행에 머물지 않았습니다. 1980년대 5·18민주화운동의 실상을 접한 뒤, 혼자만의 수행이 아닌 사회 문제에 적극적으로 나서야겠다고 결심했습니다. 1986년 ‘9·7 해인사 전국승려대회’에 참여하며 불교의 자주성을 요구했고, 이듬해에는 불교탄압대책위원장을 맡았습니다. 1994년에는 조계종 종단 개혁을 주도하며 서의현 당시 총무원장의 3선 연임에 반대하는 목소리를 높였습니다.
봉은사 주지 시절과 국정원 불법 사찰
일반 대중에게 명진 스님이 널리 알려진 것은 2006년부터 2010년까지 서울 강남의 대형 사찰인 봉은사 주지를 맡으면서입니다. 스님은 취임 직후인 2006년 12월부터 1000일 기도에 돌입했고, 2007년에는 사찰 예산과 재정을 외부에 공개하는 파격적인 결정을 내렸습니다. 이는 종단 내 분규로 얼룩졌던 봉은사의 운영을 투명하게 만들기 위한 시도였고, 결과적으로 등록 신도와 재정 규모가 크게 늘면서 도심 포교와 사찰 운영의 모범 사례가 되었습니다.
하지만 2010년 조계종이 봉은사를 총무원장 직할 직영사찰로 전환하기로 결정하면서 큰 갈등이 시작되었습니다. 명진 스님은 정치권의 외압 의혹을 제기하며 강하게 반발했고, 당시 한나라당 안상수 원내대표의 퇴출 요구설까지 나왔습니다. 결국 그해 11월 임기를 마치고 봉은사를 떠났는데요. 이후 이명박 정부 시절 청와대가 2010년부터 명진 스님의 동향을 파악하고 ‘좌파 활동 경력’을 온라인에 확산하도록 국정원에 지시했다는 사실이 국정원 개혁발전위원회 조사로 드러났습니다. 명진 스님 입적 소식이 전해진 지금, 그가 겪었던 부당한 사찰까지 다시금 조명되고 있습니다.

종단 갈등과 화해, 그리고 마지막 행보
봉은사에서 물러난 뒤에도 명진 스님은 자승 총무원장 체제의 종단 운영과 재정 문제를 비판했습니다. 이에 조계종은 2017년 4월, 스님에게 최고 수위의 징계인 제적 처분을 내렸습니다. 종교·시민사회 인사들이 징계 철회를 요구했지만 갈등은 오래 끌렸고, 명진 스님은 2023년 제적 결정이 무효라며 조계종을 상대로 소송을 냈습니다. 법원은 지난해 명진 스님의 손을 들어줬고, 올해 2월 대법원에 상고하지 않기로 하며 오랜 대립을 화해로 마무리했습니다. 그로부터 불과 반년 만에 입적하신 것이어서 더욱 안타까움을 자아냅니다.
말년에도 스님은 사회적 약자 보호와 비정규직·산업재해 문제 해결을 위해 힘썼습니다. 백기완노나메기재단 공동후원회장을 맡아 사회정의를 위해 한결같은 행보를 이어갔고, 통일 전문지 ‘민족21’ 발행인으로 활동하며 남북 민간 교류에도 관여했습니다. 쌍용자동차 해고노동자 농성장, 세월호 참사 현장, 촛불집회 등에도 빠짐없이 참석해 사회 현안에 목소리를 냈습니다.
애도 물결, 그리고 남겨진 메시지
명진 스님 입적 소식이 알려지자 불교계와 정치권, 시민사회에서 애도가 이어졌습니다. 이재명 대통령은 페이스북을 통해 대한민국 불교계의 큰 어른을 떠나보내게 된 슬픔을 온 국민과 함께 나눈다고 추모했습니다. 문재인 전 대통령도 스님의 수행은 실천이자 행동이었고, 고통받는 사람들과 함께하는 일이었다고 애도했습니다. 또한 각별한 사이였던 조계종 선명상 위원장 금강스님은 “무산소 바다 20m를 말씀하시더니 기어코 바다에서 입적하셨다”고 추모했습니다.
장례는 종교시민사회장으로 치러지며, 23일부터 봉은사 선불당에 마련된 빈소에는 김민석 더불어민주당 대표, 최휘영 문화체육관광부 장관 등 정치·문화계 인사들의 조문이 이어지고 있습니다. 전성환 청와대 시민사회수석도 전날 오후 빈소를 찾아 조문했습니다. 명진 스님이 생전 폭넓게 활동한 만큼 장례위원회에는 타 종교 인사와 문화예술계, 정계 인사들도 포함될 예정입니다.
명진 스님은 1980년대 민주화운동부터 2026년 지금까지, 어떤 권력에도 굴하지 않고 사회적 약자의 곁을 지켰습니다. 불교계 개혁과 남북 교류, 노동 문제에 이르기까지 그의 행보는 끊임없이 ‘행동’으로 이어졌습니다. 이번 명진 스님 입적은 단순한 비보를 넘어, 우리 사회가 잃은 큰 어른의 부재를 실감하게 합니다.
앞으로 남은 영결식과 다비식 일정을 정리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 일정 | 날짜 | 장소 |
|---|---|---|
| 빈소 | 8월 23일 ~ | 봉은사 선불당 |
| 영결식 | 8월 25일 오전 10시 | 봉은사 |
| 다비식 | 영결식 후 | 법주사 |
명진 스님이 남긴 의미
명진 스님의 입적은 우리에게 많은 생각을 남깁니다. 혼자만의 깨달음이 아닌 세상과 함께하는 수행, 그것이 바로 그의 삶이었습니다. 50차례가 넘는 안거와 1000일 기도 같은 철저한 수행 위에 사회 개혁과 약자 보호라는 실천을 겹쳐 보여준 것은 한국 불교사에서도 매우 이례적인 일입니다.
스님은 생전에 “이럴 때 중은 혼자 수행만 해야 하는가”라고 자문한 적이 있습니다. 광주항쟁을 폭도의 소행으로 알았다가 국가권력의 탄압임을 알게 된 뒤의 고민이었습니다. 그 고민은 이후 40년간의 행동으로 이어졌고, 많은 이들에게 영감을 주었습니다.
명진 스님 입적 소식을 접하며, 우리는 그의 뜻을 어떻게 기릴 수 있을지 고민해 보게 됩니다. 단순한 추모를 넘어, 사회적 약자와 함께하고 정의로운 사회를 위해 목소리를 내는 그의 삶을 기억하는 것이 진정한 애도가 아닐까 싶습니다.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
FAQ
Q: 명진 스님은 언제 입적하셨나요?
A: 지난 22일 오전 제주 서귀포시 하예포구 인근 해상에서 발견되셨고, 병원으로 옮겨졌지만 오전 10시 28분에 사망 판정을 받았습니다.
Q: 명진 스님의 장례는 어떻게 치러지나요?
A: 종교시민사회장으로 진행되며, 빈소는 봉은사 선불당에 마련됐습니다. 영결식은 25일 오전 10시 봉은사에서, 다비식은 법주사에서 열립니다.
Q: 명진 스님 입적 당시 어떤 장비를 착용하고 계셨나요?
A: 마스크, 스노클, 다이빙수트, 핀 등을 착용하고 있었으며, 프리다이빙 연습 중 사고가 난 것으로 보고 있습니다. 지인은 바다 수영 중 심정지가 왔을 가능성을 언급했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