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장춘 박사 아버지 우범선, 친일파 아들이 한국을 택한 사연

우장춘 박사 아버지 이야기는 한국 근대사에서 가장 극적인 장면 가운데 하나입니다. 명성황후 시해 사건에 가담한 친일파 우범선의 아들로 일본에서 태어나고 자란 우장춘 박사는 세계적인 육종학자가 된 뒤 1950년 고국으로 돌아와 한국 농업의 기틀을 세웠습니다. 올해는 우장춘 박사가 세상을 떠난 지 67주기가 되는 해로, 부산 동래구에서는 8월 4일부터 9일까지 추모주간을 운영합니다. 우장춘 박사 아버지의 이름이 낳은 그림자와 그 아들이 고국을 향해 내디딘 발걸음에는 어떤 사연이 담겨 있을까요. 이번 글에서 함께 살펴보겠습니다.

구분내용
출생1898년 일본 도쿄
아버지우범선
학위도쿄제국대학 농학박사
귀국1950년 3월 8일 부산항
대표 업적배추 원예 1호, 감귤, 감자 품종 개발
서거1959년 8월 10일, 향년 61세

아버지 우범선의 그늘에서 태어나다

우장춘 박사의 아버지는 조선 말기 친일파 인물로 알려진 우범선입니다. 우범선은 1895년 명성황후 시해 사건에 가담한 인물로, 이후 일본으로 건너가 도쿄에 정착했습니다. 우장춘 박사는 1898년 도쿄에서 태어나 일본인으로 성장했습니다. 아버지의 이름은 곧 그림자였습니다. 일본 사회에서도 우범선의 아들이라는 사실은 쉽게 지워지지 않았고, 조선인이라는 이유로 또 다른 차별을 겪기도 했습니다. 어린 시절부터 그는 자신이 누구인지, 어느 나라 사람인지에 대한 질문을 끊임없이 마주해야 했습니다. 이처럼 우장춘 박사 아버지의 존재는 그의 정체성에 깊은 상처를 남겼지만, 동시에 고국에 대한 그리움을 키우는 계기가 되기도 했습니다.

일본이라는 이름의 경계에서

우장춘 박사는 도쿄제국대학에서 농학을 전공했습니다. 특히 식물육종학 분야에서 두각을 나타냈고, 다윈의 진화론을 바탕으로 한 종의 합성 이론으로 박사 학위를 받았습니다. 이는 세계적으로도 주목받는 성과였습니다. 하지만 조선인이라는 신분 때문에 일본에서 승진이나 안정적인 연구 환경을 보장받지 못했습니다. 연구 성과는 인정받아도 신분 때문에 더 높은 자리에 오르지 못하는 경계인이었습니다. 일본에 남겨진 가족을 두고도 고국으로 돌아가겠다는 마음이 커졌습니다. 우장춘 박사 아버지의 영향은 학문의 길에도 그대로 드러났습니다. 아버지가 저지른 일을 평생 짊어지며 살아야 했고, 그 무게를 연구로 풀어내려 했습니다.

우장춘 박사 아버지

고국으로 돌아오다

1950년, 경상남도 농무국장 김종이 일본에서 활동 중이던 우장춘 박사를 직접 찾아갔습니다. 해방 직후 한반도는 극심한 식량난에 시달리고 있었고, 미곡 자유시장 정책 이후 쌀값은 1년 만에 12.7배나 폭등하며 민생이 파탄 지경에 이르렀습니다. 우장춘 박사는 한국어 한마디 제대로 하지 못했지만 고국을 돕기로 마음먹었습니다. 1950년 3월 8일 부산항에 첫발을 내디뎠습니다. 그의 나이 52세였습니다. 우장춘 박사 아버지가 남긴 과거 때문에 두려움도 있었겠지만, 그보다는 굶주리는 민중을 돕고 싶다는 의지가 더 컸습니다.

한국 농업의 초석을 쌓다

귀국 후 우장춘 박사는 부산 동래구 온천동에 있던 한국농업과학연구소 초대 원장으로 취임했습니다. 그가 맡은 첫 번째 과제는 종자 자급이었습니다. 당시 한국은 배추와 무 같은 주요 채소 종자를 대부분 외국에서 수입해야 했습니다. 우장춘 박사는 우리 땅의 기후와 토양에 맞는 품종을 개발하는 데 몰두했습니다. 한국전쟁의 혼란 속에서도 연구를 멈추지 않았고, 결국 결구배추 원예 1호를 개발했습니다. 이를 시작으로 감귤과 감자 등 다양한 품종이 개발되었습니다. 1955년에는 한국이 종자 자급의 기반을 마련하게 됐습니다. 오늘날 대한민국이 1만 4천 개가 넘는 신품종을 출원하는 농업 강국이 된 것은 이때 세워진 기초 덕분입니다.

서거 67주기 추모

우장춘 박사는 1957년 제1회 부산시 문화상 과학 부문을 수상했고, 1959년에는 대한민국 문화포장을 받았습니다. 문화포장을 받은 지 사흘 뒤인 1959년 8월 10일, 그는 향년 61세로 세상을 떠났습니다. 그의 첫 근무지였던 온천동 자리에는 현재 우장춘기념관이 자리하고 있으며, 미남교차로에서 금강식물원까지 이어지는 길은 우장춘로라는 이름으로 남아 있습니다. 올해 서거 67주기를 맞아 8월 4일 오전 10시 동래문화회관 소극장에서 추모식이 열릴 예정입니다. 추모식에서는 우장춘 박사의 생애를 담은 영상 상영과 연극 공연이 준비되어 있으며, 기념관에서는 시민 헌화와 이오난사 테라리움 만들기 체험 프로그램도 함께 진행됩니다.

마무리하며

우장춘 박사 아버지의 이름은 오랫동안 그에게 무거운 짐이었습니다. 하지만 그는 그 짐을 끝까지 지고 가면서도 고국을 위해 헌신했습니다. 세계적인 학자가 되고도 신분의 벽을 넘지 못했던 경계인, 그리고 그 경계를 스스로 허물고 조국의 품으로 돌아온 사람. 우장춘 박사의 삶은 단순한 성공담이 아니라 화해와 선택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아버지가 남긴 과거와 자신이 만든 미래 사이에서 그는 결국 고국의 미래를 택했습니다. 그리고 그 선택은 오늘날 우리가 누리는 풍요로운 식탁으로 이어졌습니다. 앞으로도 우장춘 박사 아버지의 이야기를 기억하고, 아들이 이룬 위대한 업적을 함께 기리는 시간이 이어지길 바랍니다.

자주 묻는 질문

Q. 우장춘 박사는 언제 귀국했나요?
A. 1950년 3월 8일 부산항에 도착했습니다. 경상남도 농무국장 김종이 일본을 찾아와 직접 설득한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Q. 우장춘 박사의 대표적인 업적은 무엇인가요?
A. 결구배추 원예 1호를 개발했고, 감귤과 감자 등 다양한 품종을 개량했습니다. 이를 통해 한국이 종자 자급 기반을 마련하는 데 큰 역할을 했습니다.

Q. 우장춘 박사 추모식은 언제 열리나요?
A. 올해 서거 67주기 추모식은 8월 4일 오전 10시 부산 동래문화회관 소극장에서 열리며, 8월 9일까지 기념관에서 다양한 체험 프로그램이 운영됩니다.

댓글 남기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