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3년 2월 25일, 대한민국 수도권에 실제 공습경보가 울렸습니다. 북한 전투기가 휴전선을 넘어왔다는 방송에 전국이 혼란에 빠졌지요. 그 전투기의 조종사는 목숨을 걸고 귀순을 택한 북한 공군 중위 이웅평이었습니다. 이후 그는 반공 아이돌이자 북한의 테러 대상으로 평생을 살아야 했습니다. 이웅평 프로필을 통해 그가 걸어온 길을 살펴보겠습니다.
목차
이웅평 프로필 핵심 요약
| 항목 | 내용 |
|---|---|
| 이름 | 이웅평 |
| 출신 | 북한, 7남매 중 장남 |
| 가족 | 부모, 누나들, 남동생은 김일성 주석궁 경호원 |
| 직업 | 북한 공군 전투기 조종사, 대한민국 공군 대령 |
| 귀순 | 1983년 2월 25일 미그 19 전투기로 월남 |
| 보상금 | 15억 2천만 원, 은마아파트 78채 값 |
| 별칭 | 반공 아이돌, 귀순 용사 |
| 배우자 | 박선영, 슬하 1남 1녀 |

라면봉지 하나가 바꾼 인생
이웅평은 북한의 엘리트 집안에서 자랐습니다. 아버지는 사회안전부 간부, 누나들은 교사, 남동생은 김일성 주석궁 경호원이었습니다. 그도 전투기 조종사라 바다 출입증을 받을 정도로 특별한 대우를 받았습니다. 그런데 바닷가 휴가 중 라면봉지 하나를 주웠고, 뒷면에 적힌 변질 제품 즉시 교환 문구에서 자유를 느꼈습니다. 이후 고향집에 돌아가 보니 가족이 사라져 있었습니다. 6.25 때 남쪽으로 간 친척 정황 때문에 아버지가 숙청당한 것이었습니다. 아버지는 네 살길을 찾으라고 말했고, 그 말이 남으로 기수를 돌리게 한 이유가 됐습니다.
1983년 2월 25일, 그는 이륙 직후 편대를 이탈했습니다. 고도 100미터, 시속 920킬로미터로 레이더를 피해 덕적도 상공까지 날아갔고, 대한민국 전투기 4대가 에워싸자 조종간을 흔들어 항복 의사를 전했습니다. 수원 공군비행장에 착륙한 뒤에는 총에 맞지 않게 해달라며 할 말이 많다고 외쳤습니다. 이후 기자회견에서 북한의 남침 계획을 폭로하고 1급 군사비밀도 공개했습니다.
이웅평 프로필을 보면 당시 인기를 짐작할 수 있습니다. 정부는 은마아파트 78채 값인 15억 2천만 원을 보상금으로 지급했고, 공군 소령으로 정식 임관했습니다. 연간 공식 일정이 900회에 달해 대통령보다 바쁘다는 말이 나왔고, 여의도광장에는 150만 명이 모였습니다. 지금으로 치면 BTS급 인기였습니다. 최근 SBS 꼬리에 꼬리를 무는 그날 이야기에서도 이 사건이 다시 조명되며 관심이 높아졌고, 당시 24시간을 함께한 공군 소령은 이웅평이 정이 많고 북에 남긴 가족 이야기를 자주 했다고 기억했습니다.
이웅평 프로필에서 빼놓을 수 없는 아내 박선영
이웅평은 공군사관학교 박예제 교수의 딸 박선영 씨를 만나 한눈에 반했습니다. 9살 나이 차이와 학생이라는 부담 때문에 친한 언니를 소개해 달라는 핑계로 전화를 걸고, 서울 구경을 시켜달라고 조르는 적극적인 플러팅을 이어갔습니다. 처음엔 관심이 없던 박선영 씨는 장마철 비를 흠뻑 맞고 무릎을 꿇고 결혼하겠다고 말하는 모습에서 진심을 느꼈고, 두 사람은 1984년 11월 2일에 결혼했습니다.
신혼집은 은수저와 은그릇, 외부 음식 검사가 일상이었습니다. 독침과 독극물을 경계해야 했고, 실제로 당시 북한은 도심 아파트에서 김정일 국방위원장 처조카를 암살할 만큼 위협적이었습니다. 카펫을 걷자 도청 장치까지 나왔습니다. 박선영 씨는 보안사령관을 찾아가 이혼하겠다고 맞섰고, 민간 아파트로 이사한 뒤 두 사람은 딸과 아들을 얻었습니다.
그가 평생 도운 사람들
이웅평은 북한을 떠나려는 사람들을 돕는 일에 앞장섰습니다. 88올림픽을 앞두고 김만철 일가가 태풍으로 표류했을 때는 대만으로 건너가 직접 만나 남한행을 설득했습니다. 차 키 두 개를 보여주며 남한에서의 삶을 증명했고, 김만철 일가는 대한민국행을 택했습니다. 이후 북한 출신 장교와 간첩들이 넘어올 때마다 집으로 데려와 전향을 도왔고, 대북 전단에 가족사진을 실어 보내기도 했습니다.
전직 김일성 통역관 고영환 박사와는 첫 만남부터 평생지기가 됐습니다. 북한은 이웅평을 지휘관 부인과 불륜을 저지른 인물로, 고영환 박사를 수백만 달러를 가지고 도주한 반동분자로 매도했는데, 두 사람은 자신들을 범죄자라고 부르며 웃었다고 합니다.
간이식과 마지막
이웅평은 1996년 공군 대령으로 진급했지만 건강이 급격히 나빠졌습니다. B형 간염이 간경화로 이어져 간의 70퍼센트가 굳었고, 의사는 국립묘지를 알아보라는 말까지 했습니다. 아내는 자신의 간을 주겠다고 나섰지만 그가 완강히 반대했습니다. 박선영 씨는 장기 매매 전단지에 전화를 걸어보는 등 필사적으로 노력했고, 기적처럼 여성 기증자가 나타나 첫 이식 수술이 시도됐습니다. 성공률 20퍼센트도 안 되는 수술은 성공했습니다.
회복 후 그는 면역억제제를 제때 맞아야 했지만, 북에 남긴 가족의 비극을 들은 뒤 이상 행동을 보이기 시작했습니다. 누나가 정치범 수용소에 있다는 소식과 식구들이 모두 죽었다는 이야기가 큰 충격이었습니다. 그는 처음 받은 보상금 15억 2천만 원을 평생 한 푼도 쓰지 않았습니다. 통일이 되면 자신 때문에 고통받은 가족을 위해 쓰려는 마음이었습니다.
마지막 날 그는 아내에게 물김치가 먹고 싶다고 말했습니다. 아내가 김치를 만들러 집에 간 사이 병원에서 연락이 왔고, 이웅평은 그동안 고생했다는 말과 애들을 잘 길러달라는 유언을 남긴 뒤 눈을 감았습니다.
이웅평이 남긴 의미
이웅평 프로필을 한 줄로 요약하면, 남과 북의 군복을 모두 입은 사람이었습니다. 화려한 인기 뒤에는 가족에 대한 그리움과 자유를 향한 갈망, 평생을 따라다닌 공포가 있었습니다. 그래도 그는 북한을 폭로하고 탈북민을 돕는 일을 멈추지 않았습니다. 우리가 당연하게 누리는 자유는 누군가 목숨을 걸고 선택한 결과입니다. 이웅평이 꿈꾸던 통일의 날을 보지 못한 것이 가장 큰 아쉬움으로 남습니다. 앞으로도 이런 역사를 잊지 않고 다음 세대에 전하는 것이 우리의 역할이라고 생각합니다.
자주 묻는 질문
Q: 이웅평은 어떻게 북한에서 탈출했나요?
A: 1983년 2월 25일 비행 훈련 중 편대를 이탈해 고도를 낮추고 레이더를 피한 뒤 수원 공군비행장에 착륙하는 방식으로 귀순했습니다.
Q: 이웅평 보상금은 얼마였나요?
A: 당시 기준 15억 2천만 원이었고, 은마아파트 78채를 살 수 있는 큰돈이었지만 가족을 위해 한 푼도 쓰지 않았다고 합니다.
Q: 이웅평의 아내는 누구인가요?
A: 공군사관학교 교수의 딸인 박선영 씨로, 두 사람은 1984년에 결혼해 1남 1녀를 두었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