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웅평 귀순 보상금 15억 아파트 78채 값 한푼도 안 쓴 이유

1983년 북한 전투기를 몰고 남쪽으로 날아온 한 조종사가 있었습니다. 그가 받은 이웅평 귀순 보상금은 당시 고급 아파트 78채를 살 수 있는 거액이었지만, 정작 그는 평생 한 푼도 쓰지 않았습니다. SBS ‘꼬리에 꼬리를 무는 그날 이야기’에서 재조명된 이웅평의 삶을 통해 그 이유를 따라가 보겠습니다.

항목내용
귀순 시점1983년 2월
당시 계급북한 공군 대위
넘어온 기체미그-19 전투기
보상금15억6000만 원
당시 가치고급 아파트 약 78채
사망2002년, 향년 48세
이웅평 귀순 보상금

이웅평 귀순 보상금, 어느 정도였나

이웅평은 29세였던 1983년 2월 비행 훈련 중 편대를 이탈한 뒤 초저공 비행으로 레이더망을 피해 수원 비행장에 착륙했습니다. 당시 수도권 전역에는 대공 경계경보가 발령됐고, 대한민국 공군 전투기들이 그를 에워싸는 아찔한 상황이 벌어졌습니다. 그는 항복 신호를 보낸 끝에 무사히 착륙할 수 있었습니다.

북한 공군 대위였던 그가 가져온 미그-19 전투기와 군사 기밀은 한국으로서는 매우 큰 성과였습니다. 구소련의 최첨단 주력 전투기였던 미그기는 당시 확보 자체가 큰 의미를 지녔습니다. 정부는 그에게 보상금 15억6000만 원을 지급했고, 언론은 이를 서울 강남 고급 아파트 78채와 맞먹는 액수라고 전했습니다. 이웅평 귀순 보상금은 단순한 금전 이상의 상징성을 지녔습니다. 북한 체제에 맞서 자유를 선택한 사람에게 대한민국이 얼마나 큰 가치를 두고 있는지를 보여주는 사례였기 때문입니다. 이웅평 귀순 보상금은 기체 인도와 군사정보 제공에 대한 대가로 지급된 것이기도 했습니다.

그가 귀순을 결심하게 된 데는 작은 물건 하나가 영향을 줬습니다. 북한 해변에서 발견한 남한 라면 봉지 뒷면에는 변질된 제품은 즉시 교환해 준다는 문구가 적혀 있었습니다. 소비자의 권리가 보장되는 남한 사회의 모습을 처음 접한 그는 그동안 배워온 것과 현실 사이에서 큰 혼란을 느꼈습니다. 여기에 아버지가 친척 문제로 숙청당하는 일까지 겹치면서 체제의 모순을 실감했고, 결국 목숨을 건 탈출을 선택했습니다.

화려한 인기와 감시 속 일상

귀순 직후 이웅평은 한국 사회에서 ‘반공 아이돌’로 불릴 만큼 폭발적인 인기를 누렸습니다. 한 해 900회가 넘는 안보 강연을 소화했고, 여의도에서 열린 행사에는 150만 명이 몰렸습니다. 당시 전두환 대통령의 공식 일정이 600여 회였던 것과 비교되면서 대통령보다 바쁘다는 말이 나올 정도였습니다.

그는 귀순 이듬해인 1984년 박선영 씨를 만나 결혼했습니다. 박 씨 가족의 반대가 있었지만, 두 사람은 만난 지 약 4개월 만에 결혼에 이르렀습니다. 박 씨는 자신을 좋아하는 사람과 결혼하겠다며 부모를 설득했다고 합니다. 하지만 화려한 겉모습과 달리 그의 일상은 불안과 공포의 연속이었습니다. 북한의 암살 위협과 독극물 테러 가능성을 늘 염두에 둬야 했고, 신혼집은 일반 주택이 아닌 공군 관사에 마련됐습니다.

결혼한 지 약 1년이 지났을 무렵에는 집 안에서 정보기관이 설치한 도청 장치가 발견됐습니다. 아내 박선영 씨는 이 장치를 직접 뜯어내고 보안사령관을 찾아가 항의한 뒤에야 비교적 자유로운 일상을 되찾을 수 있었다고 합니다. 박 씨는 평범한 사람으로 사는 것보다 정말 힘들었다고 털어놓기도 했습니다.

통일을 꿈꾸며 보상금을 남긴 이유

이웅평은 정부로부터 받은 이웅평 귀순 보상금을 한 푼도 쓰지 않고 보관했습니다. 언젠가 통일이 되면 북한에 남겨둔 가족을 위해 쓰겠다는 생각에서였습니다. 그는 북에 있는 누나와 가족들이 자신의 귀순으로 인해 어려움을 겪을까 봐 늘 죄책감을 안고 살았습니다. 실제로 누나는 정치범수용소에 수용됐고, 가족들이 숨졌다는 소식을 접한 뒤 그는 극심한 충격에 빠졌습니다.

1997년 간경화로 시한부 판정을 받은 뒤에는 아내의 헌신으로 당시 국내에서 전례를 찾기 어려웠던 간이식 수술을 받을 기회를 얻었습니다. 수술을 앞두고 그는 통일을 보지 못했다는 아쉬움을 드러냈다고 합니다. 수술은 성공적으로 끝났지만, 이후 가족들의 비극을 전해 들으며 죄책감이 더욱 깊어졌습니다. 그는 아내에게 그동안 고생 많았고 안 해도 될 고생을 참 많이 시켰다며 미안하고 고마운 마음을 전한 뒤 아이들을 잘 키워달라고 부탁했다고 합니다.

그가 남긴 이웅평 귀순 보상금은 결국 가족에게 전달되지 못했지만, 통일을 향한 간절함과 가족에 대한 미안함이 얼마나 컸는지를 보여주는 증거로 남았습니다. 이런 아픔 속에서도 그는 다른 탈북민을 위해 힘을 썼습니다. 1987년 함경북도 청진의과대학 의사였던 김만철 씨 일가 11명이 일본 해역에서 표류한 뒤 대만으로 이송됐을 때, 그는 정부의 비밀 특사로 현지에 급파돼 이들의 대한민국 귀순을 설득했습니다. 귀순 군인이나 간첩을 자신의 집으로 초대해 일상을 공개하며 전향을 도왔고, 계절마다 가족사진을 찍어 대북 전단에 실었습니다. 자신의 가족이 겪은 아픔을 다른 사람들이 겪지 않길 바라는 간절한 마음이었습니다.

지금도 기억해야 할 이유

이웅평의 삶은 귀순이라는 선택이 단순한 성공담이 아니라 평생의 대가를 치른 과정이었음을 보여줍니다. 그는 북한에 남긴 가족에 대한 죄책감, 남한 사회에서의 감시와 불안, 통일에 대한 기대와 좌절을 동시에 안고 살았습니다. 이웅평 귀순 보상금을 한 푼도 쓰지 않은 것은 그가 가진 돈의 가치가 아니라 그가 품은 사람에 대한 그리움과 책임감을 보여주는 상징입니다.

분단의 아픔은 한 개인의 삶에 이렇게 깊은 상처로 남을 수 있습니다. 앞으로도 우리는 이런 이야기를 단순한 과거사로 두지 않고, 통일을 준비하는 마음을 다지는 계기로 삼아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의 선택이 헛되지 않도록, 자유를 향한 용기와 가족을 향한 그리움을 오래 기억하는 것이 우리의 몫입니다. 방송에서 이야기를 나눈 출연자들도 그의 죽음을 두고 너무 허망하다고 안타까워했습니다. 그의 아내 박선영 씨는 그가 사회에 조금이라도 도움과 울림을 주는 사람으로 기억되길 바란다고 전했습니다. 우리가 이 이야기를 나누는 것도 그 바람에 조금은 닿는 일이 아닐까 싶습니다.

자주 묻는 질문

Q. 이웅평 귀순 보상금은 실제로 얼마였나요?
A. 1983년 귀순 당시 정부가 지급한 보상금은 15억6000만 원이었습니다. 당시 고급 아파트 78채를 살 수 있는 거액이었습니다.

Q. 그는 왜 보상금을 한 푼도 쓰지 않았나요?
A. 통일이 되면 북한에 남겨둔 가족을 돕기 위해 쓰려고 아껴두었습니다. 하지만 가족들이 숨졌다는 소식을 듣고 큰 죄책감에 시달리다 2002년 세상을 떠났습니다.

Q. 이웅평은 귀순 후 어떤 삶을 살았나요?
A. 공군 소령으로 임관해 한 해 900회 넘는 안보 강연을 소화했지만, 암살 위협과 정보기관의 감시 속에서 불안한 일상을 보냈습니다. 이후 탈북민 지원에도 힘썼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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